프랑스 제1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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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어: République Française
영어: French First Republic
프랑스 대혁명 중에 구성된 국민공회가 1792년에 공화제를 선포하면서 수립된 정권으로, 공식 명칭은 프랑스 공화국.[9]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사라지게 된다.
2. 역사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부르봉 왕가의 몰락과 공화국의 설립 /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 테르미도르 반동 / 나폴레옹의 집권.
2.1. 공화국의 설립
아직 공화국이 설립되기 전이었던 1792년 프랑스는 혁명에 적대적이었던 외부세력, 특히나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러한 외부의 위협[10] 은 민중들을 단합시키는 한편,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세력들의 목소리를 키우게 만들었고 곳곳에서 폭력 사태가 잇따른다. 대표적인 사례가 흥분한 민중들이 유폐된 국왕과 그 일가가 머무르고 있던 튈르리 궁전으로 쳐들어가 스위스 용병을 학살한 9월 대학살. 결국 재판을 거쳐 1793년에 루이 16세는 사형을 당하고 부르봉 왕가는 폐지된다.
2.2. 공포 정치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프랑스는 내우외환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나 수도 파리는 식량이 부족해서 '빵을 달라'는 요구와 함께 1792년에서 1793년으로 넘어가는 겨울 내내 식량 소요 사태가 끊이지 않았을 정도. 한편 외부세력과의 전쟁 역시 계속되었고 이에 1793년 4월 국민 공회는 공안 위원회(Comité de salut public)라는 행정부서를 조직하여 치안을 유지하고자 시도한다. 이 공안위원회를 이끄는 사람은 바로 급진세력의 거두인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였다. 혁명의 이름으로 국가의 적으로 인식된 자들은 줄줄이 기요틴 앞으로 끌려가기 시작했고, 공안위원회는 공포 정치의 대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로베스피에르와 급진세력이 주도한 공포정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공포정치와 로베스피에르 독재을 참조하자.
다만 이 시기에 인권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한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다. 바로 1793년 최초의 프랑스 공화국 헌법이 발효된 것. 1789년 발표된 프랑스 인권 선언[11] 을 기본으로 하여 21세 이상 성인 남성들의 보통선거권과 더불어 '주권은 인민에 속한다'는 내용의 재민주권을 확인한 이 헌법은 이후 전세계 헌법의 모태가 된다. 또한 이 시기 프랑스 공화력이라고 불리는 역법 개혁 및 반 가톨릭 운동도 수반됐다. 교회와 종교 기념물이 파괴되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잔 다르크 관련 문화재까지.(...)[12]
2.3. 테르미도르 반동
이런 상황에서 급진개혁파 안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상대적으로 온건했던 에베르 파와 당통 파가 축출된다. 이제 로베스피에르의 폭주는 점점 더 가속화됐고, 변질된 혁명을 견디다 못해 테르미도르 반동이 1794년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는 처형되고 숨어있던 온건 지롱드 파가 다시 권력을 쥐게 된다. 지롱드 파는 산악파가 주도한 1793년 헌법을 개정하고자 시도했고 1795년 헌법을 통해 양원제와 더불어 5명의 총재가 정부를 구성하는 소위 총재정부를 기본으로 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가 도입된다. 이 새로운 정치 체제는 양원제[13] , 5명의 총재에서 보이지만 권력을 철저히 나누어서 특정인물 혹은 특정 계파의 폭주를 막기 위한 것이 주 목적이었다. 문제는 이번엔 너무 권력을 나눠서(...) 국가가 똑바로 운영되지가 못했다. 행정부와 입법부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 와중에 초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경제는 엉망진창이 되자 민중들의 불만은 또다시 고조되기 시작한다.
2.4. 나폴레옹의 집권
이런 와중에 소장파 장군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군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민중의 지지를 받게 된다. 한편 위의 항목에서 상술한 입법부와 행정부의 대립은 심각한 지경이어서 입법부 의원들은 행정부 총재에 대한 암살 시도를 공공연히 시도할 정도(...)였다.[14] 이에 나폴레옹은 안개의 달 18일 쿠데타, 혹은 브뤼메르 18일의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고 종신 통령의 자리에 오르면서 프랑스 혁명, 그리고 프랑스 제1공화국은 과거로 남게 된다. 1799년 쿠데타 당시에 이미 공화국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이기는 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에 오른 1804년이 공화국의 마지막 해.
3. 둘러보기
[1] 자코뱅당이 우세. [2]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인해 세워져서 사실상 나폴레옹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3] 1799년 쿠데타 이후[4] 1790년의 성직자기본법에 의거하여 교회는 교황이 아닌 프랑스 정부의 통제를 받음.[5] Culte de la Raison. 무신론을 바탕으로 이성(理性)을 찬양. 자코뱅 내 강경파인 자크 르네 에베르에 의해 추진.[6] Culte de l'Être suprême. 이신론자였던 로베스피에르가 추진.[7] 로베스피에르 시기에는 3만명의 사제들이 처형될 정도로 가톨릭을 탄압했으나, 이후 종교 탄압은 사그라들었다.[8] 실질적으로 혁명기에도 농촌을 중심으로 대다수의 국민은 가톨릭 신자였다.[9] 제1이라는 수식어는 어디까지나 후대에 세워진 제2, 제3 공화국과의 구분을 편하게 하기 위해서 붙은 것이다.[10] 프로이센은 프랑스의 국경 지대 요새인 베르됭을 점령했고, 브라운슈바이크의 공작은 '루이 16세를 복위시키지 않으면 파리까지 쳐들어가 폭도들을 다 목매달아버리겠다'는 식의 선언서를 발표했다. 곳곳에서 온갖 유언비어가 나도는 건 당연한 상황이었다.[11] 정식 명칭은 Déclaration des droits de l'Homme et du citoyen으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라는 뜻이다.[12] 다만 원체 가톨릭이 프랑스인들의 삶에서 뿌리깊은 거였기 때문에 지방에서는 이러한 반 가톨릭 운동에 대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고 방데에서는 방데전쟁이라는 대규모 봉기까지 일어나 실제 효과는 미미했고, 이후 나폴레옹이 황제에 오르면서 교황을 자기 편으로 만들고자 다시 가톨릭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13] 하원은 500인 의회, 상원은 원로원이라고 불렸다.[14] 나폴레옹 역시 마차를 타고 가다가 폭탄 테러를 당할 뻔 했다.